문세님과의 추억을 써보았어요!

by 이명지 이명지 posted Aug 28, 2023 2023.08.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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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야만스러운 
                                  / 이명지


 다행이다. 그도 늙고 있어서….
나는 늙어가는데 당신은 팽팽하기만 한다면 그 배신감을 어쩔까? 세월이 느껴지는 꾸밈없는 그의 모습에서 안도감이 느껴지고 심지어 훈훈한 위로까지 받는 나의 유치한 마음에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며칠 전 내가 사랑하는 가수 1호인 그를 TV에서 우연히 봤다. 머릿속에 불이 반짝 켜지는 것 같은 반가움으로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느라 켠 TV의 한 프로그램에 그가 등장하고 있었다. 꾸안꾸,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모습과 면도하지 않은 얼굴에 수컷 냄새가 풀풀 살아있는 그의 캐릭터가 그대로였다. 그는 여전히 사내였다. 야성이 느껴지는 외모와는 달리 부드러운 음색으로 부르는 노래는 감성의 본질을 건드리는 발라드다. 감미로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반전의 야성은 그 파장이 훨씬 셌다. 나이 든 남자가 저리 섹시할 수 있다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그래 당신에게도 세월은 비켜 가지 않았구나. 참 멋지게 흘렀구나. 당신의 본질을 잘 지키며 멋지게 익어가고 있구나. 그래서 고마워, 참 고마워…. 한 때 나의 우상이 깨어지지 않은 것에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를 직접 본 건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였다. 나는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다. 음악 그 자체를 좋아할 뿐 사람에게 환호하는 건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연예인의 스캔들이 터져도 그건 그 사람의 행위인 거고 나는 그의 예술성만 본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주간신문 기자였던 내게 공연 관람권은 흔했다. 기회가 많다 보니 공연장에 가서도 끝까지 공연을 보고 온 적이 거의 없었다. 공연장의 함성과 현란한 조명이 라이브의 현장감을 온전히 느끼고 싶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중간에 나와버리곤 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공연을 완주했다. 그의 공연이었다. 사실 그 공연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나의 일등은 아니었다. 그의 노래를 좋아하긴 했지만, 공연장을 찾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날도 초대장이 생겼고 공연장이 집과 가까웠던 이유가 더 컸다.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목이 터지라 함께 열창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발광에 가까웠던 그 생 날것의 기억들, 울고 웃었던 그 날 그 감동의 현장은 이문세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였다. 내 안의 야만이, 야만스러움이 단번에 끌려 나온 날이었다. 그 날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활활 불 붙은 뜨거운 열기가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아 내내 들끓고 있었다.

 지성의 반대말은 야만인가? 야만과 야성은 다른 듯 같다. 야성이 그 야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야만은 무지하고 교양 없는 것을 연상하지만 나의 야만은 그것과 다르다. 들판에서 함부로 자란 나무처럼 가공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처연히 비를 맞고, 바람과 동무하고, 햇살에 반짝이는 잎들을 흔들어 풀꽃들과 속삭이는 그 날것들의 자유로운 영혼, 그것이 나의 야만이다.

 나는 늘 지성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를 추구했다. 그렇게 보이려 노력했고 내 주위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알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세상을 다 속여도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내 안에 숨겨진 나의 똘끼, 어느 순간 나는 폭발한다는 사실을.

 나의 끼는 야만에 가깝다. 안주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그것이 건드려지는 포인트는 리듬이다. 나의 감성에 접선하는 음악을 만나면 열광하게 된다.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나의 이성이, 무의식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통제의 빗장을 완강히 무찌르고 폭발하는 발화점, 그것은 주로 음악이다. 이문세의 노래들이 그랬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정동길 그 조그만 교회를 본 적이 없다.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과 걸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지나온 나의 추억이 마치 거기에 있는 듯 저릿해지는 건 무슨 연유일까? 우리 모두 세월 따라 흘러와 여기서 당신을 만났구나 싶었다. 그의 노래가 나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고 따뜻하게 토닥거렸다.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가…."

애써 외면하며 앙다물고 살았던 지난날의 내 상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그렇게 담담해질 수 있는 세월의 힘, 그 강을 당신도 건너왔구나. 그렇게 우리는 함께 육십 대가 되었구나.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그대를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세상의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그가 있어, 그와 함께한 추억이 있어 나는 정말 행복하다. 행복한 사람이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