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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불고기를 저녁 메뉴로 배를 채우고 나가는 길에 옆 테이블에 앉은 동네 아저씨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문세 씨, 같은 동네 사는데, 인사 한번 못드렸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인사 좀 나눠도 될까요?” 이문세가 “아, 물론이죠”하고 받았다. 손님 3명과 일일이 악수도 하고, 안부도 교환하고, 포옹도 했다. 한 10분을 그렇게 서서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스태프와 매니저는 애가 탔다.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 연습과 관련 인터뷰에 녹초가 된 그를 ‘쉬게’ 해야 했기 때문. 이문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이 끝날 때까지 듣고, 그들이 던진 어설픈 농담에도 호탕하게 웃었다. 지난 3월 20일 서울 홍대앞 근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나, 인터뷰가 끝나고 함께한 저녁 식사자리에서나 이문세는 한결같았다. ‘국민 얼굴’로 알려진 그와의 대면은 사실 불편하기 마련인데, 그는 마주앉은 이가 가지게 될 위축감을 미리 알아차린 듯 먼저 웃음을 날리고 농담을 던졌다. 그건 연예계에 발을 디디면서 쌓아온 학습 효과라기보다 타고난 기질 같았다.

‘긍정’과 ‘겸손’의 미학을 체화한 그는 풍파 없는 음악 인생을 풍요롭게 보냈다. 그래서인지 데뷔 30주년을 맞은 올해, 팬들은 그가 오는 6월 1일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공연장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무대에 서는 걸 ‘허락’했다. 꿈의 무대 입성은 오로지 팬들의 사랑 덕분이라고 말하는 이문세.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번 공연 자신 있느냐고 먼저 물어봐줘요.” 그렇게 물었더니, 그는 “자신 없다”고 운을 뗀 뒤 “하지만 자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관객 5만 명이 부담스럽다는 뜻이면서도 5만 명을 만족시키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복잡한 심경이 한데 어우러진 말투 속에서도 넉살 좋은 표정과 푸근한 인상은 그대로였다. 그 따뜻함 뒤에 숨겨진 생명력의 원천이 궁금했다.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라고 그는 노래했지만, 시간의 풍화를 딛고 일어선 내면의 카리스마와 열정은 더욱 거세지는 듯했다.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일까. 싸이의 ‘말춤’이 세계적 인지도를 얻기까지 ‘말상’의 원조로 오랫동안 군림해온 마굿간지기는 오늘도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힘찬 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 없지만 자신 있어야 한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스태프 회의할 때 몇 번 갔더니, 저 때문에 다들 힘들어하더라고요. 제 요구사항이 너무 많으니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디테일하고 진지하게 요구하니까요. 전 이상적인 걸 꺼내고, 스태프는 현실과 맞지 않다며 손사래를 치죠. 그런데 이제는 타협점을 찾았어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알았거든요. 가능한 것 중 최선의 것을 찾는 게 지혜롭다는 걸 깨달은 셈이죠.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은 ‘잘 노는’ 거예요.”

―이번 공연은 ‘잘 논다’가 콘셉트인가요.

“공연에서 잘 놀기 위해선 극도의 긴장감이나 두려움, 연출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제가 경직된 사명감으로 무대에 오르면, 관객도 불편할 거예요. 제 역할은 뭐니뭐니 해도 음악을 잘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10여 년 동안 제가 관여했던 일에서 서서히 빠져줘야 연출팀에서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똑같은 것의 반복일 뿐이잖아요.”

―올해 데뷔 30주년인데, 10년씩 잘라 의미를 부여한다면요.

“데뷔 이후 10년은 확장의 시대였어요. 음악적으로 배우면서 정제돼 있지 않은 것을 막 표출하는 시기였죠. 그 안에 좋은 명반들도 탄생했고, 기회가 되는 대로 음반을 발표했어요. 그 다음 10년은 결혼과 더불어, 안정의 시기를 맞았어요. 방송도 그랬고 음악도 그랬죠. 그래서인지 음악적 표현도 좀 모범적이었어요. 나쁘게 얘기하면 도드라지지도 않고 침체기도 아닌 안주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어요. 마지막 10년은 농익은 음악을 공연을 통해 표현한 시기였어요. 공연에서 얻게 된 자신감과 노하우로 ‘맛있는 공연’을 계속 만들어간 시기였어요.”

2000년대 초반, 그의 공연 ‘독창회’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무대는 의외의 연속이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창법 하나로 승부를 걸던 다른 발라드 가수의 흔한 문법을 그가 철저히 깨고 있었던 것. 그는 무대를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장르와 섞어 종합예술로 ‘격상’시켰다. 발라드라는 서정시 한 편에서 서사극을 맛보는 짜릿함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감동의 한 자락으로 추억되고 있다.

1998년부터 그렇게 시작한 독특한 뮤지컬 공연 ‘독창회’는 ‘동창회’ ‘소창회’ ‘붉은 노을’이란 이름으로 수차례 변신의 옷을 갈아입었다. 6월 올림픽주경기장 공연에 쓰이는 타이틀은 ‘대.한.민.국 이문세’다. 그는 “무대와 내용이 바뀌면 브랜드화된 공연명도 달라져야 한다”며 “인지된 타이틀을 계속 안일하게 써먹는 방식은 발전을 가로막을 뿐”이라고 했다.

―공연의 파격 구성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공연을 처음 시작하고 나서, 어느 순간부터 관객이 줄기 시작하더라고요. 제 딴엔 ‘그래도 이문센데 이 정도 관객은 들지 않겠어?’하는 기대치를 안고 살았던 것 같아요. 제 이름 때문에 와줬던 관객들에게 길들여져 있었던 셈이었죠. 관객이 줄어드니까 분석을 하기 시작했는데 똑같은 음악과 표정, 무대에 관객이 힘들어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의무적으로 하는 공연은 더이상 하지 말자고 결론내고 2, 3년 무작정 쉬었어요. 쉬면서 다시 생각했죠. 방송을 가열차게 할 것인가, 음반을 낼 것인가, 아니면 공연에 다시 도전할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결국 공연을 택했어요. 하지만 전과는 다른 ‘무엇’이 필요했어요. 그게 바로 ‘연출’이었죠. 그때부터 전문가를 도입했어요. 음향, 조명에 디자이너들이 붙었고, 공연에 무대 세트를 마련했어요. 뮤지컬처럼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 게 정답이라고 판단했어요. 그게 ‘독창회 1’이었어요. 그 후부터 100, 1000가지를 표현할 수 있는 연출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독창회’부터 매진 사례를 기록한 그의 공연은 ‘붉은 노을’에 이르러 ‘신화’를 만들어 냈다. 2009년부터 시작한 ‘붉은 노을’ 투어는 총 40개 도시에서 100회 공연 15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전국의 허름한 중소극장을 죄다 찾아다니며 펼친 ‘장돌뱅이’ 공연은 대중음악계에선 보기 드문 진풍경이다. 그는 지난 15년 공연에서 늘 2000석 이하의 ‘작은 무대’만을 고집해왔다. 그래야 단 한 명의 예외없이 모든 관객을 100% 만족시킬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 그는 “내 무대에서 단 한 명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큰 무대에서 공연하는 건가요.

“저는 5만 석 앞에서 공연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 무대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죠. 10여 년 전 마이클 잭슨 공연을 보면서 그런 결심을 더욱 다졌어요. 멀리서 행사 보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건 잭슨 잘못이 아니라, 그 무대를 연출하는 연출자가 잭슨 중심의 무대를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공연은 철저히 관객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몇 년 전 처음으로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5000석 규모로 공연을 했는데, 그때도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이 공연을 통해 노하우와 자신감을 얻으면서 한번쯤 (주경기장 공연) 해볼만 하겠다 싶어 기획한 거예요.”

―음악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3가지 순간을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사인해 달라고 했을 때예요. 제 아버지가 어떤 분이냐면, 되게 현실주의자이셔서 음악하는 아들에 대해 불만이 많으셨어요. 첫 콘서트가 있던 날, 안 오겠다고 하신 분이 몰래 오셔서 보더니, 처음으로 사인을 부탁하셨죠. 그때부터 음악하는 아들을 인정하셨어요. 두 번째는 용산에서 공연할 때 비가 많이 왔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분위기가 좋았어요. 지구가 내려앉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죠. 그때 기도했어요. ‘하느님, 저 노래하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하고. 마지막은 ‘붉은 노을’ 제주도 콘서트 매진시키고 스태프와 ‘폭탄주’를 마실 때였어요. 60명 스태프 모두 원샷, 투샷한 뒤 모두 뻗고 행복에 취했을 때였죠. 제가 이 스태프를 챙길 수 있는 위치가 됐다는 것에 무척 행복했어요.”

어릴 때 이문세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집안 분위기가 어두우면 그가 직접 나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던져서라도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중학교 때 음악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던 그는 합창단 대회에서 3년 내내 지휘상을 받았다. 중 1때 그의 성악 재능을 눈여겨본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독일로 유학을 제안했을 때, 아버지는 “사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며 거절했다.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그의 인생도 달라졌다. 학비를 대기 위해 당시 노래 클럽의 연예부장이었던 전유성의 권유로 통기타를 잡았고, 그 재능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늘 관객을 두려워하는 뮤지션 같습니다.

“한번 떠난 관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음반은 한번 실패해도 다시 찾을 수 있지만, 한번 실패한 공연은 관객이 찾지 않아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무서운 관객을 어떻게 저의 포로로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은 노래하는 내내 해야 할 숙제인 셈이죠.”

이문세 공연에는 낯설지만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가 함께하는 밴드 멤버들이 대부분 20대 젊은 청춘이라는 점과, CJ 계열의 대형 기획사가 아닌 ‘무붕’이라는 작지만 열정이 넘치는 회사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밴드가 아무리 농익은 연주자이고 실력이 좋아도 눈빛이 달라지면 저와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서로 쳐다보면서 ‘여기서 코드가 뭐지?’하며 연구하는 열정의 눈빛이 제겐 필요해요. 눈빛이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과 저는 평생 갑니다.”

젊음이 숫자로 표기되는 허영이 아니듯, 열정 역시 젊음이란 이름이 갖는 특허가 아니다. 54세 뮤지션이 전하는 ‘열정’의 의미와 가치가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unhwa.com
  • profile
    해바라기소녀 2013.04.03 21:57
    역시..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분입니다..이분이~~~~!!!
  • ?
    귀여운도깨비 2013.04.03 21:59
    잘읽었어요.^^
    근데54라는 숫자는 항상 왜 이케 어색한거죠???ㅎ
  • ?
    떵향기 2013.04.03 23:18
    역시~~~~~~^^
  • ?
    오월의장미 2013.04.04 14:30
    양 엄지 손가락 번쩍 들어 격하게 동감하는 중임~~
    역시 이문세!!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 있는 사람!!~♥♥
  • ?
    한우리 2013.04.04 17:47
    불만족스러웠던 적이 '별로' 없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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