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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3 10:47 조회수 318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그러나 신 중에 ‘등신’의 자리도 꿰차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천재 바둑 기사 택(박보검)이도 아는 유일한 가수. 1985년부터 96년까지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 서울FM 95.9Mhz)를 진행하며 ‘밤의 교육부 장관’이라 불리던 가수.


‘별밤지기’ 이문세(56)는 그렇게 80년대 후반 청소년의 밤을 지배하며 스타로 군림했다. tvN ‘응답하라 1988’(응팔)에서 그의 곡 ‘소녀’는 사랑의 충돌이 예상되는 지점에, 그리고 묘한 설렘이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며 ‘심쿵’(심장이 쿵쾅쿵쾅)거릴 때 어김없이 나오는 테마곡이다.

오혁이 리메이크한 이 곡은 현재 온라인 실시간 음악차트에서 수주 째 1, 2위를 오가며 견고한 사랑을 받고 있다.

“오리지널 가수에 대한 예의를 지키듯, '오버'하지 않고 담백하게 불러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어요. 진짜 예쁜 소녀가 부르듯 가슴 뛰는 사랑을 하는 친구들에게 직선적으로 꽂히지 않았을까요? 시간이 흘러도 이 곡이 사랑받는 건 ‘선수’들의 노래가 아니라, 서투르지만 진심을 다하는 고백이 통한 거겠죠. 지금의 40대 중·후반 세대는 소녀 시절의 정서를 끌어안고, 지금의 10, 20대는 상투적이거나 예스러운 패턴으로 읽지 않는 것 같아요. 순수한 것은 세대를 넘나드는 힘이 있지 않나 싶어요.”


◇ 30주년 맞은 '소녀' 차트 1위…"서투르지만 진심의 고백 통해"


[단독인터뷰]“잃어버린 88년의 기억 되살려준 '응팔'에 감사”

소녀’가 실린 3집(1985년)이 올해 탄생 30주년을 맞았다. 고 작곡가 이영훈과 처음 손잡고 낸 이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빅히트를 기록했다. ‘할 말을 하지 못했죠’로 시작되는 모든 곡이 전통 가요의 문법을 철저히 ‘배반’하고 세련된 팝 문법의 시작을 알렸고, 대중은 이 새로운 팝 발라드에 열광했다. 이후 4집(1987년), 5집(1988년)이 연달아 메가히트를 치며 ‘이문세 전성기’가 이어졌다.

‘응팔’이 85년부터 88년까지 관통하는 시대극이라는 점에서 이문세의 음악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양념이었던 셈. 극중 덕선(혜리)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는 못 골라도 가수는 ‘이문세’라고 꼬집어 말하는 것에서도 그의 인기와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문세는 “이젠 머릿속에 능구렁이 한 마리 들어있어서 예전처럼 수줍은 마음으로 ‘소녀’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며 “그렇게 부르려고 흉내는 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간 수많은 콘서트에서 요즘 트렌드에 맞게 예전 곡을 편곡해서 불렀는데, 어떤 때는 오리지널로 부르고 싶을 때가 있어요. 3집의 ‘지지직’거리는 사운드까지 낡은 피아노에 담아 옮겨오는 일이 힘들지만, 그렇게 공연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이르지만, 꼭 보게 될 날이 있을 거예요.”


◇ '별밤'은 오락보다 교육…"내가 만든 로고송 아직도 '온에어'"


[단독인터뷰]“잃어버린 88년의 기억 되살려준 '응팔'에 감사”

올해는 이문세가 '소녀'가 실린 3집 음반 발매와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DJ를 맡은지 30주년 되는 해다. 이문세는 "여러 모로 뜻깊은 해"라면서 "내 인생 그래프에서 가장 정점에 있는 시절이어서 더 뿌듯하다"고 말했다. /사진제공=KMOONfnd


‘소녀’가 발표되던 해, 이문세는 ‘별밤’의 새로운 문지기로 나섰다. 그러니 ‘별밤지기’ 이문세로서도 올해 30주년이다. 당시 라디오는 TV와 함께 가장 강력한 매체여서 어른들이 저녁 시간에 TV를 점령하면 청소년들은 자연스레 라디오로 옮겨오기 일쑤였다.

“12년을 하니까, 꼬마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좋든 싫든 한 번씩은 다 거치면서 합류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별밤’은 예능의 재미 요소는 거의 없었어요. 영국의 BBC처럼 약간 교육적이었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계몽까지는 아니었지만 청소년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있었어요. 그들의 문화를 자극적이고 표피적으로 담는 게 아니라, 선도하자는 분위기가 강했거든요.”

2시간 프로그램 중 우리 소리의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에 국악을 10분간 할애하기도 했고, ‘10대들의 쪽지’라는 이름의 청소년 상담 프로그램이나 영어 학습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간간이 낭만적인 잼 콘서트나 별밤 뽐내기 대회 같은 특별 이벤트가 펼쳐지긴 했으나, 대부분은 교육적이었다.

이문세는 “당시 PD들도 굉장히 엄해서 시답지 않은 개그를 치면 막 화를 냈다”면서 “지금처럼 고도의 말장난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했다.

죄를 사하는 듯한 느낌의 선율인 프랭크 푸르셀(Frank Pourcel)의 ‘메르시, 쉐리’(Merci, Cherie)가 ‘별밤’의 시그널로 쓰였지만, 이문세가 직접 지은 생일 축하곡과 로고송은 여느 히트곡 못지 않게 많은 인기를 누린 애창곡이었다. 특히 ‘창밖의 별들도 외로워~’로 시작하는 로고송은 백지영이 진행하는 현재 ‘별밤’에서도 사용 중이다. 이문세는 “이 곡의 저작권료를 아직 받고 있다”며 웃었다.


◇ "음악과 방송에 전념한 88년도, 이 시대 딛고 아직도 '진화중'"


[단독인터뷰]“잃어버린 88년의 기억 되살려준 '응팔'에 감사”

음악과 방송에서 늘 회자되던 이름 이문세. 수많은 기억과 에피소드를 간직했을 법한 88년도에 대한 이문세의 응답은 어떨까.

“제 인생의 그래프를 그리자면 80년대가 가장 높은 지점이라는 건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시에는 잘 못 느꼈어요. ‘별밤’ 특집방송 준비하고 공연 준비하는 것에 ‘올인’한 기억밖에 없었다고 할까요? 특히 ‘별밤’은 늘 그렇듯 집에서 가족 만나는 것처럼 일상이었거든요. 요즘 ‘응팔’을 보면서 ‘내가 중요한 역할을 했구나’ ‘태풍의 눈에 들어간 그 시대의 하루하루에 내 한마디가 중요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이문세는 정작 방송과 공연을 즐긴 건 2000년대 이후라고 전했다. 어떤 의미에선 80년대 열심히 씨를 뿌려 2000년대 수확하는 재미를 느낀다는 의미로 읽혔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추억 속 ‘소녀’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의 ‘소녀’를 향해 여전히 한발 성큼 내딛는 진화 또는 성장의 거울을 비추는 자기 혁신에 있다. 그것이 오늘의 이문세가 아이돌 못지 않은 스케줄을 소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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